페라리가 또 한 대를 만들었습니다. 정확히는 딱 한 대만 만들었죠.
지난 8월, 미국 몬터레이 카위크 현장에서 공개된 페라리 CZ26 이야기입니다. 이름도 낯설고, 앞으로 도로에서 마주칠 확률도 사실상 0에 가까운 차인데요. 그런데 이 차 한 대가 요즘 페라리라는 회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꽤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단 한 대를 위해 2년, 가격은 그랜저 200대 값
CZ26은 페라리의 스페셜 프로젝트 프로그램에서 나온 원오프입니다.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뜻이죠. 미국의 어느 고객이 주문했고, 완성까지 약 2년이 걸렸습니다.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프로그램으로 나오는 차들은 통상 600만 달러 이상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우리 돈으로 80억원이 넘습니다. 신형 그랜저를 200대 살 수 있는 금액입니다.

차 한 대 값으로 아파트 단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숫자죠.
출발점은 6억짜리 SF90, 나머지는 전부 디자인 값
재밌는 건 베이스가 되는 차입니다. CZ26의 뼈대는 SF90 스트라달레인데요. 국내 기준 6억원대에 팔리던 모델입니다.
6억에서 시작해 80억이 되는 겁니다. 그 차이는 전부 껍데기와 시간에서 나옵니다.
보디는 완전히 새로 짰습니다. 헤드램프는 숨은 듯 얇게 눕혔고, 전체 실루엣은 수평을 강조한 투박스 형태로 바뀌었죠. 뒷모습의 슬림한 테일램프는 12기통 모델인 12칠린드리를, 앞모습은 전기차 루체를 떠올리게 합니다. 전용 도장인 아르젠토 벨로체는 은색이 액체처럼 흐르는 느낌을 냅니다.
986마력 그대로, 페라리는 성능에 손대지 않습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80억을 냈으니 성능도 특별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죠. 아닙니다.
4.0리터 V8 트윈터보에 전기모터 세 개를 붙인 합산 986마력, 8단 듀얼클러치, 사륜구동. SF90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0-100km/h 2.5초, 최고속 328km/h도 그대로죠.
오히려 최신 페라리보다 숫자가 낮습니다. SF90의 후속인 849 테스타로사는 같은 파워트레인으로 1036마력을 냅니다. 11억원대에 팔린 한정판 SF90 XX도 1030마력이었고요.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마력이 아니라 형태라는 뜻입니다.
물론 손을 아예 안 댄 건 아닙니다. 보디가 바뀌면 공기 흐름이 달라지니까요. 라디에이터 위치와 바이패스 덕트를 옮기고, 언더보디와 볼텍스 제너레이터까지 다시 설계했습니다.
올해만 벌써 두 번째, 대수는 줄이고 단가를 올린다
CZ26이 올해 첫 작품도 아닙니다. 5월에 공개된 HC25에 이어 두 번째죠.
이게 흐름입니다. 슈퍼카 브랜드들이 판매 대수를 늘리는 대신 한 대당 받는 금액을 올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데요. 100대를 파는 것보다 한 대를 100배에 파는 게 브랜드 가치에도, 수익성에도 낫다는 계산입니다.
튜너가 만드는 원오프와는 결이 다릅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슈퍼카는 사실 꽤 많습니다. 애프터마켓 업체들이 바디킷을 씌워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CZ26이 다른 지점은 여기입니다. 양산 페라리를 그리는 바로 그 디자인 스튜디오가, 플라비오 만초니 지휘 아래 직접 그렸습니다. 남의 작품에 손대는 게 아니라 원작자가 다시 그린 셈이죠.
중고 시장에서 가치가 갈리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공장 인증이 붙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국내에 들어올 가능성은 사실상 없습니다
아쉽지만 CZ26을 한국에서 볼 일은 거의 없습니다. 주문자가 미국에 있고, 이런 차는 대부분 컬렉션에 들어가 창고를 벗어나지 않으니까요.
대신 베이스인 SF90은 국내에도 몇 대 들어와 있습니다. 슈퍼카 특성상 보험료와 소모품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요. 타이어 한 세트 교체에만 수백만원이 들고, 정기 점검 비용도 일반 수입차와는 자릿수가 다릅니다.
페라리의 원오프 문화가 궁금하다면 함께 찾아볼 이름들이 있습니다. 올해 먼저 공개된 HC25, 한정판인 SF90 XX 스트라달레, 그리고 CZ26의 얼굴에 영향을 준 페라리의 첫 전기차 루체까지요. 이 셋을 나란히 놓고 보면 페라리가 앞으로 무엇을 팔려는지 윤곽이 잡힙니다.
슈퍼카의 기준은 이제 얼마나 빠르냐가 아닙니다. 몇 대를 만들었느냐로 넘어갔습니다.